#10 소리로 그려낸 클래식
#10 소리로 그려낸 클래식
지금은 예술 분야의 협업이 너무나도 흔한 일이지만, 그 시초를 찾자면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러시아의 음악가 무소륵스키와 화가 빅토르 하르트만이 만나 탄생한 걸작. 유재후 칼럼니스트로부터 들어본다. 에디터. 황은비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Modest Mussorgsky, Pictures at an Exhibition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을 예술적 행위라고 말한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예술 행위를 통해 상상력, 창조력을 발달시켰고, 서로의 감정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문학, 미술, 음악은 각각 글, 그림, 소리를 매개체로 한 예술적 행위 또는 작품을 의미하는 것으로, 독자적으로 혹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되어 왔다. 많은 문학 작품들이 화가나 음악가들에 의해 그림과 소리로 표현되기도 했고, 반대로 뛰어난 화가나 그의 작품들, 혹은 음악가들의 생애나 작품들은 시나 소설의 멋진 소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술 작품 속에서 음악을, 음악 작품 속에서 미술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시각적이며 공간적인 예술인 미술, 그리고 소리를 매개로 하는 시간 예술인 음악은 서로 이질적이기에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가 드뷔시는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작품 속에서 음악적 이미지를 찾아내 작곡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들 작품은 다소 추상적인 것으로, 감상자들에게 통일적으로 다가오는 회화적 이미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미술 작품을 구체적으로 음악으로 형상화해 소리를 통해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작품으로는 아마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유일할 것 같다.
러시아 프스코프에 있는 무소륵스키 박물관. 출처: Shutterstock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음악을 접했고,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유복한 유년 생활을 보낸 무소륵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는 아버지의 권유로 13세 어린 나이에 제정 러시아의 소년사관학교에 들어갔다. 1857년(18세)에 소위로 임관한 그는 러시아 장교로서 탄탄한 장래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음악에의 열정을 버리지 못해 이듬해 장교 직을 그만두고 음악가의 길을 택했고, 발라키레프Milii Alekseevich Balakirev가 이끄는 ‘러시아 5인조’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며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1861년(22세) 러시아 농노 해방령으로 인해 부모의 재산이 몰수당하자 생계유지를 위해 공무원이 된 무소륵스키는 1880년(41세) 알코올 중독이 문제가 되어 해고당하기까지 20년 가까이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해고당한 후 알코올 중독 증세는 더욱 심해져 이듬해인 1881년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Ilya Repin이 그린 죽음을 앞둔 42세의 음악가 무소륵스키의 초상화. 출처: Shutterstock
무소륵스키는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Vladimir Stasov (1824~1906)의 소개로 재능있는 화가인 빅토르 하르트만Viktor Hartmann (1834~1973)을 만났다. 그는 무소륵스키의 음악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많이 준 친구였으나, 만난 지 4년만에 39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스타소프의 주선으로 열린 하르트만의 유작 전시회에 참가한 무소륵스키는 그의 그림들에서 받은 영감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10점을 선정해 피아노 모음곡을 만들어냈다. 이 ‘전람회의 그림’ 모음곡은 무소륵스키의 대표작이자 개성과 독창성이 두드러지는 명곡으로, 동시대의 러시아 작곡가들에게는 물론 인상주의 음악 창시자로 불리는 드뷔시Claude Achille Debussy의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지만 무소륵스키 생전에는 한 번도 공개 연주된 적이 없었고, 그의 사후 6년이 지난 후에야 ‘러시아 5인조’ 한 사람인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Andreevich Rimskii-Korsakov에 의해 악보가 출판돼 빛을 보기 시작했다.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되었으나 미술 작품을 그려낸 음악의 강렬한 인상으로 인해 많은 지휘자가 대규모 관현악곡으로 편곡해 연주하고 싶어 했다. 러시아 태생의 지휘자인 쿠세비츠키Sergei Alexandrovitch Kussevitzky도 그중 한 사람으로, 음악의 중심지인 파리에 소개하고자 ‘관현악의 마술사’로 불리는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에게 편곡을 의뢰했다. 1922년 이렇게 새로 태어난 관현악곡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륵스키의 음악성에 화려한 색채 효과를 덧붙인 걸작으로 오늘날에는 피아노 독주곡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전람회의 그림’은 하르트만의 작품 중 10점을 골라 음악으로 표현한 표제음악이지만 처음과 중간중간 마치 미술관에서 산책하는 듯 묘사한 ‘프롬나드(Promenade, 산책)’를 삽입해 그림 만이 아닌 전시회 전체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한 점이 이채롭다.
프롬나드Promenade 1
소박하고 단순한 멜로디지만 힘차고 명쾌하다. 들뜬 마음으로 전시된 그림을 관람하러 가는 발걸음이 느껴진다.
제1곡 난쟁이 Gnomus
중세 라틴어인 Gnomus는 땅속의 보물을 지키는 뾰족한 모자를 쓴 작은 남자 요정을 의미한다. 난쟁이 요정의 기묘한 걸음걸이, 그로테스크한 형상이 연상되는 곡으로 그림은 분실되어 없지만 하르트만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한 난쟁이 요정의 모습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프롬나드Promenade 2
첫 산책보다 발걸음이 느려지고 들뜬 마음이 안정을 찾은 듯하다.
제2곡 옛 성 Il Vecchio Castello
중세 이탈리아 옛 성의 모습과 성 앞에서 류트(lute, 16세기 무렵 유행한 현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음유 시인을 그린 그림이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선율이지만 쓸쓸한 느낌도 묻어나온다. 라벨의 관현악 편곡에서는 알토색소폰이 음유 시인의 구슬픈 가락을 연주한다.
16세기 무렵 유행한 현악기 류트의 모습은 당시 시대의 다양한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출처: Shutterstock
프롬나드Promenade 3
발걸음이 힘차고 경쾌하다. 다음 그림을 기대하는 듯하다. 30초가량의 아주 짧은 산책이다.
제3곡 튈르리 정원, 놀이를 끝낸 아이들의 싸움 Tuileries, Dispute d’enfants après jeux
파리 중심지의 튈르리 공원에서 아이들이 놀이하다 언쟁하는 모습들을 익살스럽게 그려냈다. 다음 그림은 바로 옆에 전시된 듯 산책없이 바로 다음 곡으로 넘어간다.
제4곡 비들로 Bydlo
비들로는 폴란드의 소달구지를 의미한다. 커다란 수레바퀴가 달린 짐수레를 힘겹게 끌고 가는 소의 모습, 황량한 농촌의 풍경이 함께 묘사한다. 소달구지가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은 장중하기까지 하다.
프롬나드Promenade 4
발걸음이 무겁다. 단조로 바뀐 산책의 멜로디는 슬픈 생각에 잠겨있는 관람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제5곡 껍질을 덜 벗은 병아리들의 춤 Ballet de poussins dans leurs coques
분위기가 바뀌어 귀엽고 사랑스럽다. 막 깨어난 병아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듯하다. 하르트만이 디자인한 병아리 형상의 발레 의상 스케치를 묘사한 곡이다. 그림이 남아 있어 그림을 보며 음악을 들어볼 수 있다.
제6곡 폴란드의 부유한 유태인과 가난한 유태인 Samuel Goldenberg et Schmuyle
‘사무엘 골덴베르그와 슈무일레’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부유한 유태인인 ‘사무엘 골덴베르그’는 가죽 모자를 쓰고 금빛 수염을 기른 당당한 모습이다. 가난한 유태인인 ‘슈무일레’는 백발노인으로 모자를 벗고 지팡이를 공손히 쥔 채 앉아있다. 시름에 잠겨있거나 아니면 졸고 있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부유한 유태인의 멜로디는 장중하고 거만하다. 가난한 유태인의 가락은 경박스럽다. 아첨을 떠는 모습 같기도 하다.
프롬나드Promenade 5
처음 시작할 때의 프롬나드와 동일하다. 이제 전람회장을 절반 정도 관람한 듯, 잠시 쉬고 난 후 다시 새로운 그림들을 보러 가는 기분이다. 라벨의 관현악 편곡에는 생략되어있다.
제7곡 리모쥬의 시장 Limoges, le marché
도자기로 유명한 프랑스 중부지방 도시 리모쥬의 시장 분위기가 떠들썩하다. 장 보러 나온 여인들의 수다를 묘사한 듯 흥겹고 시끄럽다. 팡파르 같은 외마디 울림과 함께 프롬나드 없이 다음 그림으로 넘어간다.
제8곡 카타콤베 Catacombe
화가와 그의 친구 두 사람이 램프를 들고 있는 안내인과 함께 로마시대의 지하 무덤을 둘러보고 있다. 음산한 분위기의 화음이 지속되다가 다소 부드러워진 잔잔한 멜로디가 흐른다. 작곡가 자신이 ‘죽은 언어로 죽은 자와 하는 대화’라는 부제를 달아 놓은 이 가락은 그림 속에서 죽은 친구의 모습을 발견한 무소륵스키가 영혼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미지를 그려내는 듯하다.
제9곡 바바-야가의 오두막집 La Cabane sur des pattes de poule (Baba-Yaga)
바바-야가는 러시아 전설 속의 마녀로, 닭발이 지탱하고 있는 오두막집에서 살며 다른 마녀들과 달리 빗자루가 아닌 절구통을 타고 날아다닌다. 하르트만의 그림은 ‘암닭의 발 위에 세워진 오두막’이라는 이름의 시계 스케치이다. 무소륵스키는 이 그림에서 바바-야가의 이미지를 떠올린 듯하다. 어린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바바-야가의 난폭하고 교활한 행태와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모습을 실감 나게 그려낸다.
제10곡 키예프의 거대한 문 Le grande porte de Kiev
키예프 시 공모전에 출품할 목적으로 스케치한 커다란 누각의 대문을 묘사한 곡이 ‘전람회의 그림’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거대한 문을 그려내듯 장대하고 화려하다. 축제 분위기에 성당의 종소리도 울린다. 대문 주위를 산책하는 듯 프롬나드 멜로디도 합세한다. 현란한 손놀림의 피아노 독주로 들어도 좋지만 관현악으로 편곡한 ‘키예프의 커다란 문’은 당당하고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색채감으로 최고의 음악적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 음악 들어 보기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Modest Mussorgsky, Pictures at an Exhibition
– 관현악 편곡
– 피아노 독주
Evgeny Kissin: Mussorgski – Pictures at an Exhibition (Youtube link)
Evgeny Kissin: Mussorgski – Pictures at an Exhibition 출처: 해당 유튜브 영상 캡처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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