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소리로 그려낸 클래식
#10 소리로 그려낸 클래식
지금은 예술 분야의 협업이 너무나도 흔한 일이지만, 그 시초를 찾자면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러시아의 음악가 무소륵스키와 화가 빅토르 하르트만이 만나 탄생한 걸작. 유재후 칼럼니스트로부터 들어본다. 에디터. 황은비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Modest Mussorgsky, Pictures at an Exhibition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을 예술적 행위라고 말한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예술 행위를 통해 상상력, 창조력을 발달시켰고, 서로의 감정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문학, 미술, 음악은 각각 글, 그림, 소리를 매개체로 한 예술적 행위 또는 작품을 의미하는 것으로, 독자적으로 혹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되어 왔다. 많은 문학 작품들이 화가나 음악가들에 의해 그림과 소리로 표현되기도 했고, 반대로 뛰어난 화가나 그의 작품들, 혹은 음악가들의 생애나 작품들은 시나 소설의 멋진 소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술 작품 속에서 음악을, 음악 작품 속에서 미술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시각적이며 공간적인 예술인 미술, 그리고 소리를 매개로 하는 시간 예술인 음악은 서로 이질적이기에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가 드뷔시는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작품 속에서 음악적 이미지를 찾아내 작곡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들 작품은 다소 추상적인 것으로, 감상자들에게 통일적으로 다가오는 회화적 이미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미술 작품을 구체적으로 음악으로 형상화해 소리를 통해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작품으로는 아마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유일할 것 같다.
러시아 프스코프에 있는 무소륵스키 박물관. 출처: Shutterstock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음악을 접했고,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유복한 유년 생활을 보낸 무소륵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는 아버지의 권유로 13세 어린 나이에 제정 러시아의 소년사관학교에 들어갔다. 1857년(18세)에 소위로 임관한 그는 러시아 장교로서 탄탄한 장래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음악에의 열정을 버리지 못해 이듬해 장교 직을 그만두고 음악가의 길을 택했고, 발라키레프Milii Alekseevich Balakirev가 이끄는 ‘러시아 5인조’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며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1861년(22세) 러시아 농노 해방령으로 인해 부모의 재산이 몰수당하자 생계유지를 위해 공무원이 된 무소륵스키는 1880년(41세) 알코올 중독이 문제가 되어 해고당하기까지 20년 가까이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해고당한 후 알코올 중독 증세는 더욱 심해져 이듬해인 1881년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Ilya Repin이 그린 죽음을 앞둔 42세의 음악가 무소륵스키의 초상화. 출처: Shutterstock
무소륵스키는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Vladimir Stasov (1824~1906)의 소개로 재능있는 화가인 빅토르 하르트만Viktor Hartmann (1834~1973)을 만났다. 그는 무소륵스키의 음악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많이 준 친구였으나, 만난 지 4년만에 39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스타소프의 주선으로 열린 하르트만의 유작 전시회에 참가한 무소륵스키는 그의 그림들에서 받은 영감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10점을 선정해 피아노 모음곡을 만들어냈다. 이 ‘전람회의 그림’ 모음곡은 무소륵스키의 대표작이자 개성과 독창성이 두드러지는 명곡으로, 동시대의 러시아 작곡가들에게는 물론 인상주의 음악 창시자로 불리는 드뷔시Claude Achille Debussy의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지만 무소륵스키 생전에는 한 번도 공개 연주된 적이 없었고, 그의 사후 6년이 지난 후에야 ‘러시아 5인조’ 한 사람인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Andreevich Rimskii-Korsakov에 의해 악보가 출판돼 빛을 보기 시작했다.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되었으나 미술 작품을 그려낸 음악의 강렬한 인상으로 인해 많은 지휘자가 대규모 관현악곡으로 편곡해 연주하고 싶어 했다. 러시아 태생의 지휘자인 쿠세비츠키Sergei Alexandrovitch Kussevitzky도 그중 한 사람으로, 음악의 중심지인 파리에 소개하고자 ‘관현악의 마술사’로 불리는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에게 편곡을 의뢰했다. 1922년 이렇게 새로 태어난 관현악곡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륵스키의 음악성에 화려한 색채 효과를 덧붙인 걸작으로 오늘날에는 피아노 독주곡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전람회의 그림’은 하르트만의 작품 중 10점을 골라 음악으로 표현한 표제음악이지만 처음과 중간중간 마치 미술관에서 산책하는 듯 묘사한 ‘프롬나드(Promenade, 산책)’를 삽입해 그림 만이 아닌 전시회 전체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한 점이 이채롭다.
프롬나드Promenade 1
소박하고 단순한 멜로디지만 힘차고 명쾌하다. 들뜬 마음으로 전시된 그림을 관람하러 가는 발걸음이 느껴진다.
제1곡 난쟁이 Gnomus
중세 라틴어인 Gnomus는 땅속의 보물을 지키는 뾰족한 모자를 쓴 작은 남자 요정을 의미한다. 난쟁이 요정의 기묘한 걸음걸이, 그로테스크한 형상이 연상되는 곡으로 그림은 분실되어 없지만 하르트만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한 난쟁이 요정의 모습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프롬나드Promenade 2
첫 산책보다 발걸음이 느려지고 들뜬 마음이 안정을 찾은 듯하다.
제2곡 옛 성 Il Vecchio Castello
중세 이탈리아 옛 성의 모습과 성 앞에서 류트(lute, 16세기 무렵 유행한 현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음유 시인을 그린 그림이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선율이지만 쓸쓸한 느낌도 묻어나온다. 라벨의 관현악 편곡에서는 알토색소폰이 음유 시인의 구슬픈 가락을 연주한다.
16세기 무렵 유행한 현악기 류트의 모습은 당시 시대의 다양한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출처: Shutterstock
프롬나드Promenade 3
발걸음이 힘차고 경쾌하다. 다음 그림을 기대하는 듯하다. 30초가량의 아주 짧은 산책이다.
제3곡 튈르리 정원, 놀이를 끝낸 아이들의 싸움 Tuileries, Dispute d’enfants après jeux
파리 중심지의 튈르리 공원에서 아이들이 놀이하다 언쟁하는 모습들을 익살스럽게 그려냈다. 다음 그림은 바로 옆에 전시된 듯 산책없이 바로 다음 곡으로 넘어간다.
제4곡 비들로 Bydlo
비들로는 폴란드의 소달구지를 의미한다. 커다란 수레바퀴가 달린 짐수레를 힘겹게 끌고 가는 소의 모습, 황량한 농촌의 풍경이 함께 묘사한다. 소달구지가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은 장중하기까지 하다.
프롬나드Promenade 4
발걸음이 무겁다. 단조로 바뀐 산책의 멜로디는 슬픈 생각에 잠겨있는 관람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제5곡 껍질을 덜 벗은 병아리들의 춤 Ballet de poussins dans leurs coques
분위기가 바뀌어 귀엽고 사랑스럽다. 막 깨어난 병아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듯하다. 하르트만이 디자인한 병아리 형상의 발레 의상 스케치를 묘사한 곡이다. 그림이 남아 있어 그림을 보며 음악을 들어볼 수 있다.
제6곡 폴란드의 부유한 유태인과 가난한 유태인 Samuel Goldenberg et Schmuyle
‘사무엘 골덴베르그와 슈무일레’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부유한 유태인인 ‘사무엘 골덴베르그’는 가죽 모자를 쓰고 금빛 수염을 기른 당당한 모습이다. 가난한 유태인인 ‘슈무일레’는 백발노인으로 모자를 벗고 지팡이를 공손히 쥔 채 앉아있다. 시름에 잠겨있거나 아니면 졸고 있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부유한 유태인의 멜로디는 장중하고 거만하다. 가난한 유태인의 가락은 경박스럽다. 아첨을 떠는 모습 같기도 하다.
프롬나드Promenade 5
처음 시작할 때의 프롬나드와 동일하다. 이제 전람회장을 절반 정도 관람한 듯, 잠시 쉬고 난 후 다시 새로운 그림들을 보러 가는 기분이다. 라벨의 관현악 편곡에는 생략되어있다.
제7곡 리모쥬의 시장 Limoges, le marché
도자기로 유명한 프랑스 중부지방 도시 리모쥬의 시장 분위기가 떠들썩하다. 장 보러 나온 여인들의 수다를 묘사한 듯 흥겹고 시끄럽다. 팡파르 같은 외마디 울림과 함께 프롬나드 없이 다음 그림으로 넘어간다.
제8곡 카타콤베 Catacombe
화가와 그의 친구 두 사람이 램프를 들고 있는 안내인과 함께 로마시대의 지하 무덤을 둘러보고 있다. 음산한 분위기의 화음이 지속되다가 다소 부드러워진 잔잔한 멜로디가 흐른다. 작곡가 자신이 ‘죽은 언어로 죽은 자와 하는 대화’라는 부제를 달아 놓은 이 가락은 그림 속에서 죽은 친구의 모습을 발견한 무소륵스키가 영혼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미지를 그려내는 듯하다.
제9곡 바바-야가의 오두막집 La Cabane sur des pattes de poule (Baba-Yaga)
바바-야가는 러시아 전설 속의 마녀로, 닭발이 지탱하고 있는 오두막집에서 살며 다른 마녀들과 달리 빗자루가 아닌 절구통을 타고 날아다닌다. 하르트만의 그림은 ‘암닭의 발 위에 세워진 오두막’이라는 이름의 시계 스케치이다. 무소륵스키는 이 그림에서 바바-야가의 이미지를 떠올린 듯하다. 어린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바바-야가의 난폭하고 교활한 행태와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모습을 실감 나게 그려낸다.
제10곡 키예프의 거대한 문 Le grande porte de Kiev
키예프 시 공모전에 출품할 목적으로 스케치한 커다란 누각의 대문을 묘사한 곡이 ‘전람회의 그림’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거대한 문을 그려내듯 장대하고 화려하다. 축제 분위기에 성당의 종소리도 울린다. 대문 주위를 산책하는 듯 프롬나드 멜로디도 합세한다. 현란한 손놀림의 피아노 독주로 들어도 좋지만 관현악으로 편곡한 ‘키예프의 커다란 문’은 당당하고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색채감으로 최고의 음악적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 음악 들어 보기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Modest Mussorgsky, Pictures at an Exhibition
– 관현악 편곡
– 피아노 독주
Evgeny Kissin: Mussorgski – Pictures at an Exhibition (Youtube link)
Evgeny Kissin: Mussorgski – Pictures at an Exhibition 출처: 해당 유튜브 영상 캡처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
#9 가을이 담겨있는 클래식
#9 가을이 담겨있는 클래식
가을과 닮은 음악가, 가을이면 생각나는 브람스는 흐리고 바람 부는 날이 많은 독일 북부 함부르크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선율에 깊이가 있고 진한 색을 내듯 묵직하다. 첼로의 음색도 가을을 닮았다. 깊어가는 가을, 유재후 칼럼니스트로부터 웅장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에 대해 들어본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음악, 가을이면 생각나는 그 시절
올해 9월 하순 초가을 하늘색은 유독 파랗다. 아마도 올여름이 유난히 무더웠고 홍수와 태풍으로 힘겨웠기에 더욱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초저녁 불그레한 노을빛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 조그만 전원주택 정원을 가득 채운 가을꽃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마시는 와인 한 잔은 이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호사로움이다. 음악이 들려오면 더욱 좋다.
1978년 이맘때쯤엔 천도리에 있었다. 설악산 서북쪽에 있는 인제군 서화면 천도리는 최전방이다. 여름에 입대해 배치받은 곳이 하필 강원도 중에도 오지 산골이었다. 당시 천도리는 군인들을 위한 상점이나 술집, 다방이 몇 개 있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갓 입대한 졸병은 그나마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누군가 면회를 올 경우에만 허락되는 유일한 민간인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9월 말 어느 날 연병장 청소하는 중에 선임병이 불렀다. “면회 준비해”. 그러더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내 군복 다림질을 해주었다. 가족 중엔 면회 올 사람이 없었다.
그 시절 좋아하는 음악과 마음을 담아 건네던 추억의 카세트 테이프 출처 : pixabay
대학 입학 후 첫 미팅에서 만난 여인도 음악을 좋아했다. 각자 친구들을 불러 모아 주말이면 명동의 한 음악감상실에서 음악 해설 감상회를 열고 식사도 함께했다. 그 여인이 면회를 왔다. “가을이 되니 음악을 듣고 싶어 할 것 같아서… 특히 브람스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온 음악은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두 곡이었다. 누구의 연주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강원도 산골 허름한 여관방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었던 브람스는 잊을 수가 없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Johaness Brahms, 1833~1897)의 음악에서는 가을 냄새가 짙게 난다. 북구에 가까운 함부르크 태생으로 아버지보다 무려 17살 연상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평생 간직한 채, 독신으로 살면서 스승 슈만의 부인 클라라를 연모한 브람스의 음악 속에 쓸쓸함과 고독, 그리고 깊은 성찰과 함께 애잔한 그리움이 함께 배어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음악에는 우수가 깃든 서정성뿐 아니라 초가을의 청명한 하늘빛 같은 맑고 시원한 음색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브람스 특유의 목가적인 분위기가 함께 느껴지기도 한다.
Johannes Brahms, 1889 by Carl Brasch 출처 : Wikipedia
브람스의 작품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소위 ‘3B’로 불리는 독일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 바흐, 베토벤, 브람스 세 사람을 비교해 보아도 현저히 적은 수의 작품을 남겼다. 작곡에 신중을 기한 면도 있지만 아마도 두 선배 작곡가들이 브람스에게는 넘지 못할 커다란 벽으로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히 브람스가 가장 존경했던 베토벤은 그의 음악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바그너에게도 베토벤은 우상과 같은 존재였으나 그는 베토벤과는 완전히 다른 경향의 음악을 창조해가며 독일 낭만주의 음악을 개척해 갔다. 그렇지만 브람스는 낭만주의 시대를 살면서도 바그너류의 오페라에는 관심이 없었고, 교향시 같은 표제음악은 작곡할 생각조차 없었다. 베토벤이 남긴 고전주의 형식의 작품들에 자신의 작품을 하나씩 더해가며 진정한 베토벤의 후계자가 되고 싶었던 듯하다. 4개의 교향곡 (베토벤 9곡), 4개의 협주곡 (베토벤 7곡), 3개의 피아노 소나타 (베토벤 32곡), 3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베토벤 10곡), 2개의 첼로 소나타 (베토벤 5곡) 등 브람스의 작품 수는 그의 비교적 긴 생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베토벤에 필적할만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그만큼 작곡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브람스, 첼로 소나타 1번, 2번
첼로는 바이올린과 더불어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현악기지만 바로크 시대까지만 해도 주로 저음을 풍부하게 해주는 반주 역할을 담당했던 악기였다. 비발디와 바흐 같은 바로크 시대 대 작곡가들이 첼로 독주곡을 남겼지만, 그 작품들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채 묻혀 있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빛을 보았다. 첼로 소나타 Sonata for Cello and Piano는 피아노를 수반한 첼로 독주곡이다. 고전주의 소나타 형식으로 작곡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인 첼로 소나타는 베토벤이 남긴 5곡이 선구적이며 가장 유명하다. 그에 필적할 만한 첼로 소나타는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후에야 브람스에 의해 탄생했다.
출처 : pixabay
첼로의 음색은 가을을 닮았다. 그리고 묵직하고 신중하지만, 왠지 쓸쓸하고 고독한 이미지의 브람스도 가을과 닮아있다. 1865년, 브람스는 어머니를 잃게 된다. 그는 스승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이 사망한 후 구상했던 ‘독일 레퀴엠’ 작곡을 어머니를 잃은 것을 계기로 다시 시작했으나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자 잠시 접어두고 3년 전 시작한 첼로 소나타 1번 작곡에 몰두했다.
첼로 소나타 1번은 브람스의 우수 어린 서정성이 가장 드러나는 시기의 작품으로 3개의 악장을 모두 단조로 구성했다. 어느 악장에서도 밝고 즐거운 분위기가 드러나지 않는다. 피아노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하지만 첼로의 구슬픈 음색에 눌려 우수의 깊이는 점점 더해간다. 조용히 쓸쓸하게 끝맺음하는 1악장에 이은 2악장은 미뉴에트 풍으로 다소 밝게 시작되나, 이내 애절하게 탄식하는 듯한 첼로의 호소력으로 인해 슬픔이 더욱 드러난다. 그렇지만 아름답다. 알레그로 빠르기의 3악장은 앞 악장들과 달리 힘차다. 밝은 분위기는 아니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악상인 카프리치오 풍으로 전개되는 마지막 악장은 슬픔을 잊게 하는 돌파구다.
가을이 시작된 에덴가든 풍경
브람스는 1886년부터 3년 동안 스위스 툰 Thun에서 여름을 보냈다. 친구들과 함께 즐겁고 여유롭게 보낸 이 시기에 작곡한 곡들은 밝고 생동감이 넘친다. 두 번째 첼로 소나타는 1번 소나타를 발표한 지 21년 후인 1886년, 그의 나이 53세에 스위스 툰 호숫가에서 작곡했다. 브람스 특유의 우수 어린 서정미는 그대로 느껴지나 한결 세련되어 있고 정열적이다. 1악장은 시작부터 격렬하다. 첼로의 어두운 음색에 피아노의 경쾌한 트레몰로(Tremolo, 빨리 떨리는 듯이 되풀이하는 연주법)가 더해져 웅장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피치카토(Pizzicato,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연주하는 방법)로 시작한 후 아다지오 빠르기로 전개되는 2악장의 첼로 멜로디는 지극히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저음의 구슬픈 첼로 음색이지만 쓸쓸함과 고독이 아닌 사랑의 감정만 그려진다. 2악장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3악장은 정열적이고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중간에 숨을 고르듯 우아한 악상이 전개되기도 하나 전반적으로 복잡하고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다. 그렇지만 재미있다. 4악장은 밝고 따뜻하다. 첼로의 가락은 온화하고 사랑스럽고, 피아노는 맑고 화려하다. 브람스의 첼로소나타 1번에서 늦가을의 쓸쓸함이 느껴진다면 첼로 소나타 2번은 9월 하순 초가을의 화창한 날씨와 닮은 듯하다.
♪ 음악 들어 보기
브람스 첼로 소나타 1번
Brahms, Cello Sonata No.1 Mischa Maisky (첼로) & Pavel Gililov (피아노)
브람스 첼로 소나타 2번
Brahms, Cello Sonata No.2 Norbert Anger (첼로) & Keiko Tamura (피아노)
유재후 클래식 칼럼니스트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입행, 파리 지점장, 경영지원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클래식 음악 관련 글쓰기, 강연 등을 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LP로 듣는 클래식 : 유재후의 음악 이야기>가 있다.
#8 고전의 힘을 보여주는 클래식
#8 고전의 힘을 보여주는 클래식
새로움과 정통성 사이의 고민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클래식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20세기 변화의 흐름 가운데 고전의 형식을 이어간 시벨리우스의 작품들은 예술의 본질을 향한 치열한 고민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 Sibelius, Symphony No.2 in D major, Op.43
“현대에는 왜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같은 작곡가가 나타나지 않나요?” 이런 질문을 가끔 받는다. 제대로 답하려면 음악사 흐름에 관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아야 하지만, 종종 미술에 비유하는 것으로 간단히 대신하곤 한다. “현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물론 빈센트 반 고흐 화풍으로 그리는 화가도 없지요. 그들처럼 잘 그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20세기 이후엔 인물이나 자연의 사실주의적 혹은 인상주의적인 표현조차도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이지요.” 비유가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이해하는 듯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예술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그 시대의 조류潮流에 맞춰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나가는 것이다. 20세기 들어서 음악계에도 새로운 조류가 나타난다. 18~19세기의 약 200년 가까이 서양 고전 음악의 이론적 바탕이자, 모든 기악곡의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조성(tonality, 음악에서 으뜸음에 의하여 질서와 통일을 가지게 되는 여러 음의 체계적 현상)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온음음계를 사용한 드뷔시Claude Debussy(1862~1918)의 인상주의 음악을 시작으로, 전통적인 조성음악을 비판한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1874~1951)는 결국 조성의 구속을 당하지 않는 무조음악無調音樂을 만들어 낸다. 난해한 현대음악 시대가 시작한 것이다. 이후 거의 모든 작곡가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법에서 탈피해 새로운 음악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답게 헬싱키 시내에는 시벨리우스공원이 있다.
그렇지만 시대적 흐름에 역행해 고전적 형식의 틀 속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긴 작곡가들도 있다. 핀란드의 국민음악가로 생전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시벨리우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드뷔시, 쇤베르크 등과 비슷한 시기에 핀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시벨리우스Jean Sibelius(1865~1957)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한때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지녔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원한 가족들의 권유로 헬싱키 법대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청강생으로 음악 공부를 병행한 그는 결국 음악가의 길을 택해 24세에 헬싱키 음악원을 졸업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1892년(27세)에 귀국한 시벨리우스는 모교인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어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핀란드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작품들, ‘쿨레르보 교향곡’ 교향시 ‘전설’ ‘투오넬라의 백조’ 등을 발표해 일약 핀란드 국민음악가로 추앙을 받기 시작했고, 특히 1899년(34세)에 발표한 교향시 ‘핀란디아’는 핀란드의 광활한 자연과 민중의 투쟁 정신을 고취하는 듯한 선율로 애국심에 불을 지폈다. 당시 핀란드는 러시아에 의해 자치권을 박탈당하는 위기에 처했기에 일련의 시벨리우스의 작품들은 핀란드 저항정신의 상징과도 같은 음악이 되었고, 시벨리우스는 30대 초부터 정부로부터 종신연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교직 생활을 접고 작곡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이후 7개의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등 명곡을 남겼고, 생전에 전 유럽과 미국 등 세계적으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20세기 현대음악의 흐름 가운데, 시벨리우스는 고전적인 형식을 지키며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펼쳐냈다.
시벨리우스는 1957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알고 있는 작곡가 중에서는 가장 장수한 작곡가이다. 후기 낭만주의 시대를 거쳐 현대음악이 주류였던 20세기 전반부까지 살았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후기 낭만파 스타일의 음악이 아니고 현대음악은 더더욱 아니다. 초기의 작품들은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이나 점차 시대를 역행해 베토벤 시대의 고전적인 수법으로 민족적 색채가 짙은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나타냈고, 1924년(59세)에 작곡한 마지막 교향곡, 그리고 2년 후인 1926년(61세)에 발표한 교향시 ‘타피올라’를 끝으로 30년간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시벨리우스가 작곡을 중단한 이유를 밝히지 않아 음악평론가들이나 애호가들은 제각기 해석하기도 했다. 이미 충분한 종신연금을 받고 있기에 작곡에 대한 열의가 없었을 수도 있고, 고전파 시대의 소나타형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형식의 교향곡을 구상했으나 한계에 부딪혀 중단했을 수도 있다.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은 20세기 초엽부터 음악계에 불어닥친 현대음악에 대한 거부감, 그로 인해 자신은 시대에 뒤떨어진 작곡가라는 인식으로 인해 자신감을 상실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시벨리우스는 드뷔시나 쇤베르크처럼 새로운 음악세계를 창조한 작곡가와 비교했을 때 음악사적인 평가는 높지 않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작품의 가치로 볼 때는 동시대 현대음악가들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주되는 횟수는 훨씬 더 많다. 그가 남긴 7개의 교향곡은 모두 명곡으로 꼽힌다. ‘베토벤 이후 가장 뛰어난 교향곡 작곡가’라는 평을 남긴 평론가도 있다. 물론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 등을 생각하면 언뜻 수긍이 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과 동일 선상에 위치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7개의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고 자주 연주되는 교향곡은 2번이다.
시벨리우스의 작품에서는 북유럽 특유의 자연풍경을 연상할 수 있다.
1899년(34세)에 교향곡 1번과 교향시 ‘핀란디아’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시벨리우스는 3년 후 두 번째 교향곡을 발표한다. 1번과 같은 고전적 형식으로 작곡했지만, 작곡가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완성도가 높다. 묘사적인 음악은 아니지만 1, 2악장은 북유럽의 대자연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와 민요풍의 가락이 시벨리우스만의 낭만적인 개성을 드러내며, 3, 4악장은 투쟁을 통해 쟁취한 승리의 외침을 그려내는 듯하여 언제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1악장) 전통적인 소나타형식으로, 목관으로 제시되는 주선율이 나타나기 전에 현악기로 반주에 해당하는 선율을 먼저 내세운다. 이어 전개되는 민요풍의 선율들은 북유럽의 독특한 자연환경을 그려내는 듯 광활하면서도 목가적인 분위기를 그려낸다.
(2악장) 안단테의 빠르기로 다소 느리게 전개된다. 1악장과 대비해 전반적으로 어둡고 우수에 차 있다. 핀란드의 겨울 풍경을 그려내는 것 같기도 하고, 러시아의 지배하에 놓인 핀란드인의 침통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듯 쓸쓸하고 우울하다.
(3악장) 스케르초 특유의 빠르고 경쾌한 악장이나 중간에 잠시 나타나는 오보에의 부드러운 선율은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다시 빠른 속도의 불안한 분위기에 긴장감이 감돌다가 쉬지 않고 4악장으로 넘어간다.
(4악장) 알레그로 빠르기의 승리의 찬가다. 3악장의 불안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감동이 벅차오르는 환희의 악장이다. 베토벤 운명교향곡 4악장의 승리에 찬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중간에 민요풍의 우울한 선율이 분위기를 잠시 가라앉히는 듯하나, 다시 차분하고 평화롭게 시작되는 승리의 선율이 점차 고조되면서 금관의 우렁찬 함성에 모든 악기들이 합세해 힘찬 환희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 음악 들어보기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 Sibelius, Symphony No.2 in D major, Op.43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Frankfurt Radio Symphony Orchestra
https://www.youtube.com/watch?
v=iXU8EXL7a_4
비엔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Vienna Philharmony Orchestra, Leonard Bernstei
-1, 2악장
#7 인생의 빛과 그림자를 담은 클래식
#7 인생의 빛과 그림자를 담은 클래식
인생의 명암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예술을 꽃 피우며 살았을까. 많은 이에게 선망의 대상인 누군가의 삶에도 굴곡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빛과 그림자를 오가며 탄생한 그의 명곡은 찬란한 작품성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 인생을 담아 더욱 가치가 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Mozart, Piano Concerto No.20 in D minor, K.466
오랜 직장생활을 마치고 은퇴하게 되면 노년의 삶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다. 다행히 젊을 때부터 즐겼던 음악 감상과 오디오 취미생활에 덕분에 지루할 새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혼자만의 취미에 질릴 때면 친구들과 당구를 치기도 하는데, 오랜만에 함께 하는 놀이는 재미와 묘한 흥분도 느끼게 한다. 모차르트도 당구를 굉장히 즐겼다고 전해진다. 집에 당구대를 설치해 놓을 정도로 좋아했고. 그의 생애를 그린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당구대 위에서 공을 굴리면서 작곡하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그리 능숙하진 않았던 듯하다. 내기 당구와 카드 도박으로 많은 돈을 잃어 빚에 쪼들렸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무리하게 작곡한 것이 건강 악화와 관련 있으리라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6살의 모차르트를 데리고 연주 여행을 시작했다. 10살까지 4년간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의 전역을 여행했고, 13세부터 17세까지 이탈리아를 세 차례나 방문해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귀국 후 고향 잘츠부르크 궁정 음악가의 자리를 얻었으나, 신동으로 유럽 전역에 이름을 떨쳤던 모차르트에게는 만족스러운 자리가 아니었기에 21세 때인 1777년에 모친을 대동하고 만하임, 파리 등 대도시로 구직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미 신동의 신비로움이 사라진 모차르트에게 제안된 일자리는 기껏해야 베르사유궁의 오르가니스트 자리였다. 실망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 후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 악장 자리를 얻어 신분 상승이 되었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대도시로 향해 있었다. 당시의 잘츠부르크는 그의 능력을 펼치기엔 너무 좁은 변방의 소도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잘츠부르크를 지배하고 있던 대주교로부터 하인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불만이 겹쳐 결국 1781년(25세)에 빈으로 떠났고, 이후 35세로 세상을 등지기까지 빈에서 프리랜서 작곡가로서 화려하면서도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
계몽주의 군주 요제프 2세가 통치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인 빈에서도 모차르트는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1782년(26세)에 요제프 2세가 의뢰한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피’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작곡가로서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점차 작곡 의뢰, 귀족 자제들 교육, 연주 활동 등으로 상당한 수입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에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해 안정된 가정도 꾸렸다. 프리랜서 작곡가로서의 주된 수입원은 오페라 공연과 당시 빈 귀족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악기인 피아노와 관련된 것이었다. 비단 작곡가로서만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인정받고 있었던 모차르트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이나 소나타 등을 직접 연주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해 인기를 끌었고 상당한 수입을 얻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모차르트 조각상
빈에서의 모차르트의 마지막 10년의 삶은 경이롭다. 짧은 기간에 수많은 명곡을 남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수입을 얻었지만, 경제적인 관념은 형편없었던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내기 당구, 카드 도박 등으로 항상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아내 콘스탄체 또한 화려한 생활을 즐겼기 때문에 점차 빚이 늘어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모차르트는 엄청난 속도로 작곡을 해야만 했다. 특히 당시 빈 청중에게 가장 인기가 높아 비교적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던 피아노 협주곡은 1784년(28세)부터 1786년(30세)까지 3년 동안 무려 12곡을 작곡하고 직접 연주를 했다. 베토벤이 남긴 피아노 협주곡은 5곡, 쇼팽과 브람스는 불과 2곡만을 남겼다. 이에 비하면 모차르트의 작곡 속도는 경이로운 수준이다. 그렇다고 작품들의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다. 이 12곡뿐 아니라 그가 남긴 27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 10살 무렵에 작곡한 4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걸작으로 인정받는 명곡들이다. 이 중에서 가장 뛰어난 혹은 가장 좋아하는 작품 한 곡만 골라야 한다면 매우 난처하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음악 애호가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일 것 같다. 특히 1785년(29세)에 작곡한 20번부터 세상을 등진 1791년(35세)에 작곡한 27번까지 마지막 8곡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꼭 한 곡만을 골라야 한다면 베토벤이 유독 좋아해 따로 카덴차(협주곡에서 악장이 끝나기 직전에 독주자의 기교를 보여주기 위해 화려하고 자유롭게 반주 없이 연주하는 부분)를 작곡했다는 20번을 꼽을 것 같다.
경제적 상황이 심각해지기 시작한 1985년에 모차르트는 3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중 가장 먼저 작곡한 곡이 제20번이다. 이전의 19곡 협주곡은 모두 장조(major)의 작품들인 데 반해 20번은 단조(B minor)의 조성이다. 어둡고 비극적인 인상을 주는 단조 조성의 협주곡은 피아노로 밝고 화려한 기교를 과시하는 것을 즐겼던 당시 청중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파격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모차르트가 왜 단조 조성의 협주곡을 구상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 최고의 음악가로 추대받고 화려한 생활을 즐겼지만, 그 속에 숨겨진 슬픔과 고독을 한 번쯤 음악에 담고 싶었던 건 아닐지 추측해 보는 정도이다.
(1악장)
현악기들이 어둡고 다소 심각한 분위기의 주제 화음을 연주하고, 이어 나타나는 피아노의 독주 선율도 슬픔을 억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여리고 수줍게 표현되지만, 점차 활기를 찾아간다. 슬픔이 가득 배인 선율 속에서도 이따금 화려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후반부 2분가량의 카덴차 역시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두운 편이나 끝부분에서는 피아노의 화려한 기교를 맘껏 뽐내며, 이에 화답하는 관현악도 잠시 밝은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나 이내 어두운 단조의 화음으로 조용히 끝을 맺는다.
(2악장)
단순해 보이는 선율의 피아노 독주로 시작하는 2악장은 지극히 아름답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로망스 악장이다. 사랑의 감정을 가득 담은 듯 밝고 부드럽다. 중간에 잠시 격정적인 분위기로 바뀌어 피아노와 관현악이 서로 경쟁하듯 하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다시금 첫 부분의 로망스 분위기로 돌아와 밝고 서정적으로 끝난다.
(3악장)
피아노와 관현악이 빠른 속도의 화려한 선율들을 번갈아 연주하면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전반적으로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악장이나 이따금 D 단조 조성이 가져다주는 어둡고 슬픈 표정이 읽히기도 한다. 30초가량의 짧은 카덴차가 아쉬움을 주지만, D 장조로 바뀐 화려하고 당당한 코다(coda, 종결부)는 충분히 그 아쉬움을 달래 준다.
이 곡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은 피아노 협주곡이지만 적절한 터치와 속도감으로 밝고 아름다운 선율 속에 내재된 고독과 슬픔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연주가는 많지 않다. 1960년 벨기에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등진 노년의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 여사가 같은 해에 이고르 마르케비치Igor Markevitch 지휘로 녹음한 20번 협주곡은 모차르트의 단순한 선율 속에 감춰진 슬픔을 지극히 아름답게 그려낸 명연주이다. 60년이 넘은 녹음이지만 음질도 아주 좋다. 실황 영상으로는 일본 출신의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 미츠코 우치다Mitsuko Uchida의 연주를 추천하고 싶다. 다소 격한 감정 표현이 어색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연주는 아주 좋다.
♪ 음악 들어보기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Mozart, Piano Concerto No.20 in D minor, K.466
Clara Haskil / Igor Markevitch, Orchestre Lamoureux (1960)
https://www.youtube.com/watch?
v=eF74h_WhLiI
Mitsuko Uchida, piano & conduct
https://www.youtube.com/watch?
v=yM8CFR01KwQ
#6 마음을 사로잡는 클래식
#6 마음을 사로잡는 클래식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제대로 읽은 한 권이 더 낫다는 말이 있다. 음악도 제대로 들은 한 곡이 오래도록 심금을 울리기도 한다. 여기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클래식, 베르디의 오페라를 소개한다.
베르디 :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Verdi : Opera ‘La Traviata’
한번 읽었을 뿐인데 유독 오래 기억에 남아있는 소설들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 형 집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서가에서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춘희’, 다소 촌스러운 느낌이 나는 제목이었지만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의 작품이기에 읽기 시작했고, 눈물 흘리며 책장을 덮었을 땐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녘이었다. 때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 2악장의 선율이 가련한 여주인공의 죽음과 오버랩 되어 10대 후반 청소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요즘엔 일본어 제목인 ‘춘희椿姬’ 대신에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elias’이라는 제명을 사용한다. 소설 속 주인공 마르그리뜨 고띠에는 실존 인물이다. 마리 뒤플레시스(Marie Duplesis,1824~1847), 프랑스 노르망디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5살에 파리로 이사한 후, 옷가게 점원으로 일하다 한 저명인사의 정부情婦가 되면서 파리 사교계에 모습을 나타냈다. 타고난 미모에 점차 교양을 쌓아간 그녀는 막대한 후원금을 바탕으로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살롱(salon, 작가, 예술가들의 사교 모임)의 주인이 되었다. 살롱을 드나들던 동갑내기 젊은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와 잠시 연인이 되기도 하고, 한때 작곡가 리스트의 정부였다고도 전해진다. 귀족과 결혼했지만 23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fils, 동명의 소설가인 아버지와 구분하기 위해 아들 뒤마Dumas Fils 로 불리기도 한다)는 마리 뒤플레시스와의 짧은 연애담에 픽션을 더해 1848년에 ‘동백꽃 여인’이라는 제명의 소설을 발표했고, 마리는 사후 1년 만에 마르그리뜨 고띠에Marguerite Gautier라는 소설 속 주인공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리고 1853년에는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Violetta라는 불멸의 이름을 또 하나 얻었다.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는 결혼한 지 4년만인 1840년에 두 자녀에 이어 아내마저 떠나보낸 후 창작 의욕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의뢰받은 오페라의 공연 결과도 실패로 끝나 한때 음악가의 길을 포기할 생각도 했다. 절망 속의 베르디를 구해낸 작품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으로 유명한 ‘나부코Nabucco’였다. 베르디의 최초 성공작으로 1842년 초연 시 프리마돈나였던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이후 평생을 함께 한 동반자가 되었다. 자신감을 얻은 베르디는 ‘에르나니 (Ernani, 1844년)’, ‘맥베스(Macbeth, 1847년)’ 등을 연이어 발표해 이탈리아에서 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87세까지 장수한 베르디가 남긴 오페라는 30여 편에 이른다. 이 중 작품성이 가장 뛰어난 오페라 하나를 선정해 보라고 하면 망설여진다. 그렇지만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한편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라 트라비아타’를 선택할 것 같다. 1948년 한국에서 국내 성악가들에 의해 공연된 최초의 오페라 역시 ‘라 트라비아타’였다.
1852년 파리에서 39세의 베르디는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을 대본으로 한 연극 ‘동백꽃 여인’을 관람한 뒤 오페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했다. 2년 전 대성공을 거둔 작품 ‘리골레토’의 대본 작가에게 의뢰해 이듬해 1월 오페라 대본을 받은 즉시 작곡에 착수해 불과 4주 만에 3막으로 구성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완성했다.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는 이탈리아어로 ‘타락한 여인’ 또는 ‘탈선한 여인’ 등을 의미한다. 20대 초반에 파리 화류계의 꽃이 된 여인 비올레타는 부유한 아버지를 둔 시골 청년 알프레도의 진정한 사랑을 받아들인 후, 화류계를 떠나 한적한 교외에서 두 사람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 비올레타를 찾아와 아들과의 이별을 강요하고, 결국 비올레타는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알프레도 곁을 떠나 다시 화류계 생활로 돌아간다. 내막은 모른 채 강한 배신감을 느낀 알프레도는 파리의 파티장에 나타나 비올레타에게 심한 모욕을 준다. 뒤늦게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된 알프레도가 비올레타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이미 병마로 쇠약해졌고, 사랑의 힘으로 기력을 회복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알프레도의 품에 안긴 채 죽음을 맞이한다.
(제 1막)
- 축배의 노래 (알프레도, 비올레타 이중창 및 합창)
친구로부터 비올레타를 소개받은 알프레도가 파티 시작 전 축배의 노래를 선창한다. 사랑의 감정을 담은 알프레도의 노래에 이어 비올레타가 화답한다. “사랑은 덧없으니 이 순간의 쾌락을 즐기자”라는 내용으로 알프레도와 비올레타의 사랑에 대한 다른 시각을 암시한다.
- 빛나고 행복했던 어느 날 (알프레도, 비올레타 이중창)
모두 춤을 추기 위해 무도장으로 자리를 옮기지만 창백한 얼굴의 비올레타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아 쉬겠다고 한다. 알프레도는 곧바로 되돌아오고, 비올레타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진심 어린 사랑을 고백한다. 1년 전부터 사랑해 왔다는 알프레도의 말에 자신은 그런 사랑의 감정을 모른다고 비웃지만 결국 동백꽃을 건네주며 내일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 아, 그이인가 (비올레타)
홀로 남은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의 사랑 고백에 혼란을 느낀다. 진실한 사랑과 현실의 쾌락 사이에서 망설이며 기쁨과 고통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으로 아리아를 부른다. 10분 가까이 독창으로 부르는 난이도가 높은 아리아로 프리마돈나의 연기력과 음악성 고스란히 드러나는 명곡이다.
(제 2막)
- 그녀 없이는 행복도 없네 (알프레도)
파리 근교의 시골집에서 비올레타와 3개월째 함께 살고 있는 알프레도는 그녀와 함께하는 행복한 삶을 노래한다.
-이중창 (제르몽, 비올레타)
알프레도가 외출한 사이에 아버지 제르몽이 비올레타를 방문한다. 알프레도와의 동거생활을 위해 전 재산을 투자한 비올레타의 희생과 사랑을 확인한 제르몽이지만 딸의 혼사를 앞둔 가정의 명예를 위해 아들과 헤어져 달라는 부탁을 하고, 비올레타는 비통한 심정으로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다. 20분 가까이 연주되는 바리톤과 소프라노의 이중창으로 비극의 시작점이다.
- 프로방스의 바다와 육지 (제르몽)
비올레타가 떠나면서 남긴 이별의 편지를 읽고 있는 알프레도 앞에 아버지 제르몽이 나타나 프랑방스의 고향집으로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며 부르는 바리톤 아리아의 대표적인 명곡이다. 그렇지만 실의에 빠져있는 알프레도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제 3막)
- 지난 날이여 안녕 (비올레타)
뒤늦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알프레도가 도착할 거라는 소식을 접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죽음을 예감한 비올레타는 “너무 늦었다”라고 비통하게 울부짖고, 이어 “안녕, 행복했던 지난 날이여…” 로 시작하는 절망적인 아리아를 노래한다.
알프레도가 도착하자 잠시 기운을 차린 비올레타는 열정적인 포옹과 함께 기쁨에 찬 이중창을 함께 부르지만 곧 쓰러지고, 의사와 함께 제르몽도 도착한다.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건네며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초상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몇 마디 유언을 남기고 알프레도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다.
베르디는 역사적 영웅들의 장엄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나 ‘맥베스’나 ‘오텔로’ 등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오페라의 주요 소재로 담아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무겁고 비통하다. ‘라 트라비아타’ 역시 비극적인 줄거리를 담고 있지만 비극의 성격은 다르다. 삼각관계나 질투와 시기, 복수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다른 오페라들과 달리, 동시대 평범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줄거리도 단순한 편이며, 극적인 요소나 음악성으로 볼 때 베르디의 다른 오페라보다 우위에 있는 작품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실존했던 가련한 여인의 삶과 사랑 이야기가 아름다운 아리아를 통해 전해지는 감동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 음악 들어보기
베르디 :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Verdi : Opera ‘La Traviata’
제 1막 아, 그이인가.. 소프라노 조수미
https://www.youtube.com/watch?v=3GKejeUgw_Y
제 3막 지난 날이여 안녕, 소프라노 조수미
#5 듣는 재미가 있는 클래식
#5 듣는 재미가 있는 클래식
종종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의도치 않아도 즐거운 것이 있다. 클래식 중에도 유난히 듣는 재미가 있는 곡이 있어 추천한다. 꾸밈 없이 살아가는 모습만으로 인간에게 여러 깨달음을 주곤 하는 동물이 바로, 이 곡의 주인공이다.
생-상스 : 동물의 사육제 Camille Saint-Saëns : Carnaval des Animaux
동물들의 꾸밈없는 행동과 살아가는 모습들을 즐겨 본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일요일 오전엔 어김없이 SBS방송의 TV동물농장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인간과 동물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해 듣다보면 훈훈한 감정과 연민이 교차되는 묘한 감정이 일기도 한다. 동물이 없는 사람들만의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삶은 동물들과 함께 했다. 만 오천년 전 구석기 시대의 라스코 동굴이나 알타미라 동굴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 인간에게 있어서 동물들은 같이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예술적 대상이기도 했고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회화 속에 남겨진 동물들은 다양하고 작품수도 많다. 하지만 음악 속에 남겨진 동물들의 모습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미술이 공간과 시각적인 예술인 반면, 음악은 시간과 청각적인 예술이기에 아무래도 음(音,소리)으로만 동물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은 어렵거나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 속의 뻐꾸기나 나이팅게일의 노래, 슈베르트의 피아노 오중주 ‘송어’, 쇼팽의 ‘강아지 왈츠’, 그리고 차이코브스키의 ‘백조의 호수’ 등의 음악들이 떠오르지만 그 제목의 동물들은 음악의 한 형식 속에 잠깐 드러나는 상징적인 것일 뿐이다. 서양음악 사상 다양한 동물들의 모습과 행동을 음악으로 표현해 낸 작품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가 유일하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생-상스(Camille Saint-Saëns, 1835~1921)는 모차르트 못지않은 신동이었다. 3살에 피아노를 배우고, 5살에 작곡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10살 조금 지난 1846년에 공개연주회를 열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하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암보로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16살에 파리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생-상스는 이후 파리의 대형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하고, 불과 26세의 나이에 음악학교 교수로 임명되는 등 음악가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굳혀갔다.
이 무렵 유럽 음악의 중심지는 독일, 오스트리아 지역이었다.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음악계는 오페라 등 극음악들이 주류를 형성했고, 교향곡이나 실내악 등 순수음악에 대한 관심도는 지극히 낮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프랑스 음악계는 관현악단들을 창설하거나 재정비 해 가면서 기악곡 부흥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1871년, 36세의 생-상스는 한 발짝 더 나아가 국립음악협회를 조직하여 포레, 프랑크, 랄로 등 동시대 프랑스 음악가들과 함께 기악곡 위주의 작품발표회를 개최하는 등 프랑스 음악계를 주도해 나갔다. 오늘날 자주 연주되는 생-상스의 대표적인 기악곡들도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김연아의 쇼트 프로그램 배경음악으로 쓰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독 친근한 곡인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도 그 중 한 작품이다.
생-상스는 유독 여행을 좋아했다. 86세의 나이에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여행 중 폐렴으로 세상을 등질 때까지 유럽 내 여러 국가는 물론 미국, 남미,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연주 또는 여행을 목적으로 돌아다녔다. 1886년(51세)엔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연주여행을 떠났지만 독일 음악계에 대한 비판의 글을 쓴 적이 있는 생-상스에 대한 거부감으로 연주여행은 순탄치 못했다.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첼리스트cellist인 친구가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한 시골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당시 마을에서는 사육제carnival가 준비 중이었고, 생-상스는 친구가 주최하는 사육제 마지막 날 음악회를 위해 참신한 음악을 구상했다. 사람들의 축제 마지막 날, 동물들이 사육제를 즐기는 모습을 음악을 통해 그려낸 것이다. 형식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동물들의 특성에 맞게 악기들을 자유롭고 교묘하게 구성해 작곡한 ‘동물의 사육제Carnaval des Animaux’는 음악사적 가치나 작품성으로 볼 때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생-상스 작품 중 가장 친근하고 유명한 곡임에는 틀림없다.
(제 1곡) 서주와 사자 왕의 행진 – 두 대의 피아노와 현악 합주
두 대의 피아노가 트레몰로(tremolo, 음이나 화음을 빨리 규칙적으로 떨리는 듯이 되풀이하는 주법)로 시작하여 힘차게 행진곡 풍의 서주를 연주한 후, 현악기들이 사자의 늠름한 주제를 표현한다. 사자의 포효가 위압감을 주지만 우스꽝스런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제 2곡) 암탉과 수탉 – 두 대의 피아노, 클라리넷, 바이올린, 비올라
피아노와 현악으로 수탉을, 클라리넷으로 암탉을 묘사하는 듯하다. 다투는 것인지 사랑싸움인지 모르지만 한가롭지는 않다.
(제 3곡) 당나귀 – 두 대의 피아노
피아노로만 연주되는 프레스토의 빠른 곡이다. 16음표만으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당나귀의 행동을 그려낸다. 야성적이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제 4곡) 거북이 – 피아노, 현악 합주
피아노와 현악이 함께 안단테의 속도로 거북이의 느린 행동을 묘사한다. 오펜바흐의 유명한 캉캉 춤 멜로디를 아주 느리게 편곡해 빠르고 경쾌한 원곡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그려낸다.
(제 5곡) 코끼리 –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피아노의 왈츠 리듬에 맞춰 묵직한 저음의 콘트라베이스가 코끼리가 춤추는 모습을 연주한다. 코끼리의 주제는 선배 작곡가 베를리오즈의 ‘바람 정령의 춤’을 편곡했다. 요정이 코끼리로 둔갑한 것이다.
(제 6곡) 캥거루 – 두 대의 피아노 피아노
두 대로 캥거루를 묘사한다. 꾸밈음으로 리듬감을 살려 긴 뒷다리만으로 어색하게 뛰어다니는 캥거루의 모습이 잘 연상된다.
(제 7곡) 수족관 – 플루트, 첼레스타, 두 대의 피아노, 현악 합주
물의 움직임을 그려내는 피아노의 아르페지오 선율을 배경으로 타악기인 첼레스타와 플루트가 환상적인 음색으로 수족관 물고기들의 유연한 움직임을 묘사한다.
(제 8곡) 귀가 긴 등장 인물 – 바이올린
등장 인물들personnages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당나귀나 노새를 표현한 것 같다. 제 3곡의 당나귀가 야생 당나귀라면 이 곡은 유순하고 길들여진 당나귀인 것으로 보인다. 바이올린 합주로만 익살스럽게 묘사돼 귀가 여린 사람들을 빗대어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제 9곡) 숲 속의 뻐꾸기 – 두 대의 피아노, 클라리넷
두 대의 피아노가 잔잔한 화음으로 숲 속의 정경을 묘사하고, 클라리넷이 뻐꾸기 울음소리를 흉내 낸다. 아주 단순한 곡조들의 반복이지만 아늑하고 차분한 숲 속 분위기가 감돈다.
(제 10곡) 큰 새장 – 두 대의 피아노, 플루트, 현악 합주
다양한 새들이 모여 있는 커다란 새장 안의 광경을 그려냈다. 피아노와 현악, 그리고 플루트로 크기가 다른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모습을 경쾌하고 화려하게 보여준다.
(제 11곡) 피아니스트 – 두 대의 피아노, 현악 합주
피아니스트를 동물들 집단에 포함시켰다. 두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는 매우 서툴다. 연습곡을 되풀이 하지만 박자도 틀리고 템포도 엉망이다. 점점 좋아지기는 한다. 아마도 무능한 피아니스트들을 동물에 빗대어 조롱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제 12곡) 화석 – 두 대의 피아노, 클라리넷, 실로폰, 현악 합주
화석도 동물 집단에 포함시켰다. 익숙한 곡조들이 들린다. 실로폰으로 연주하는 곡은 생-상스 자신의 작품 ‘죽음의 무도’ 중의 해골을 묘사한 가락이다. 프랑스 동요 ‘반짝 반짝 작은별’ 주제도 잠시 나타나며, 클라리넷은 롯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중의 아리아를 연주하기도 한다. 익숙한 멜로디들을 화석으로 상징화시킨 의도는 잘 파악하기 어렵지만, 아마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존재할 음악들을 살짝 드러낼 의도는 아니었을까?
(제 13곡) 백조 – 두 대의 피아노, 첼로 독주
동물의 사육제 전 14곡 중에서 뿐 아니라 생상스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명곡이다. 다소 풍자적이고 익살스러운 앞의 곡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곡이다. 우아한 백조가 미끄러지듯 헤엄쳐 다니는 모습이 쉽게 연상된다.
(제 14곡) 피날레 – 모든 악기
동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사육제를 즐긴다. 잠깐씩 각 동물들의 주제가 연주되고 흥겨운 축제는 절정에 다다른다.
자칫 클래식은 길고 지루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도 이곡은 부담 없이 추천할 만하다. 전체 14곡으로 구성된 모음곡이지만 총 연주 시간은 20분 남짓이기 때문이다. 동물들을 상상하면서 들어보는 음악은 익살스럽기도 하고 때론 짓궂기도 하지만 쉽고 재미있어 어린이들을 위한 음악회에서도 가장 많이 연주된다. 평년보다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쩍 많아진 5월의 끝자락. 누구에게라도 함께 들어보자고 해도 좋을 명곡으로 마무리해 보시길 바란다.
♪ 음악 들어보기
생-상스 : 동물의 사육제 Camille Saint-Saëns : Carnaval des Animaux
2014년 일본 연주 실황, 마르타 아르헤리치, 기돈 크레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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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WHy8Hh3iggg
#4 노년의 천재가 탄생시킨 걸작
#4 노년의 천재가 탄생시킨 걸작
흔히 무엇이든 다 때가 있다고들 말한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는 기적도 있지만, 대부분 쉬이 짐작할 수 없는 때를 위하여 부단히 살아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죽음에 이르기 불과 몇 개월 전 역사적인 걸작을 탄생시킨 작곡가, 세상의 인정과 이해를 그토록 바랐던 천재는 노년에 그때를 만났다.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Franck, Sonata for Violin and Piano in A major
벨기에에 관심이 높아진 것은 둘째 딸을 그 나라로 시집 보낸 후부터다. 대한민국 경상도 정도의 면적에 천만 명 조금 넘는 인구의 비교적 작은 나라지만 강소국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불이 넘어 영국, 프랑스, 일본을 앞지른다. 비단 경제력뿐이 아니다. 2021년 FIFA 랭킹 세계 1위의 나라인 데다, 초콜릿과 맥주 등 먹거리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그렇지만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벨기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두 강대국에 번갈아 침략당해 속국 신세였다가 1839년 ‘런던조약’에 따라 네덜란드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따라서 유럽 문화의 황금기인 18~19세기에는 음악, 미술 분야에서 내세울 만한 예술가가 없었던 듯하다. 평소 앙리 비외땅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즐겨들었고, 세자르 프랑크의 교향곡과 실내악곡들도 좋아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비교적 덜 알려진 프랑스 작곡가들로만 알고 있었다.
세자르 프랑크(César Franck, 1822-1890)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벨기에 동부의 리에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11세에 리에주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파리로 건너가 15세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했을 정도로 음악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아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부친과의 불화,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파리에 정착한 이후 10여 년 동안은 음악가로서의 역량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했던 성당의 오르가니스트organist가 되기로 결심했고, 몇몇 성당을 옮겨 다니다 36세인 1858년에 파리의 성 클로틸데 성당Basilique Ste-Clotilde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한 이후 세상을 등질 때까지 30년가량을 봉직했다.
‘바이올린 소나타’는 일반적으로 피아노를 동반한다. 그렇다고 피아노가 반주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크시대나 초기 고전파시대에는 오히려 피아노가 주악기고 바이올린이 반주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차르트 이후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역할이 대등해지면서 두 악기가 서로 대립, 화합하면서 멋진 조화를 만들어 내는 명곡들이 많이 탄생했다. 바이올린 소나타들 중 가장 인기 있고 자주 연주되는 곡은 모차르트와 베토벤 그리고 브람스가 남긴 작품들이다. 그렇지만 이 대 작곡가들 작품 외에 한 곡을 추가한다면 서슴없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택하고 싶다.
1992년 발행된 프랑스 공립 우표. 벨기에 태생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활동한 세자르 프랑크를 담았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 무렵 유럽 음악의 중심지는 독일, 오스트리아 지역이었다. 브람스의 신고전주의와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안톤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등 후기 낭만주의의 물결이 유럽 음악계를 주도했던 시기이다.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음악계에서는 오페라 등 극음악들이 주류를 형성했고, 교향곡이나 실내악 등 순수음악에 대한 관심도는 지극히 낮았다. 그런 가운데 파리의 한 성당 오르가니스트였던 세자르 프랑크는 바흐의 오르간곡을 연구하면서 틈틈이 오라토리오, 실내악곡, 오르간 독주곡 등을 작곡했으나 어느 한 곡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50세에 오르간 명연주자로 인정받아 파리음악원 교수로 임명된 이후에도 작곡가로의 명성은 얻지 못했던 것 같다.
그의 독창적인 천재성은 음악가로서는 매우 늦은 시기인 60세 이후에 나타났다. 낭만파 시대에 살았지만,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개척해 나간 결과물이 생의 끝 무렵에서나 탄생한 것이다. D 단조 교향곡, 교향적 변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사중주 등 그의 대표적인 명곡들은 모두 60세 이후 작곡한 작품들이다. 소박하지만 품격 있는 표현력, 그리고 깊은 신앙심에 바탕을 두어 내면적 성찰이 가득 담긴 프랑크 말년의 곡들은 가벼운 살롱풍의 음악에 점차 지겨움을 느낀 프랑스 청중들에게도 큰 감동을 준 듯하다. 67세에 작곡한 현악사중주 초연이 끝난 후 청중들의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은 노년의 작곡가는 “이제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7개월 후 사고로 인한 늑막염으로 프랑크는 세상을 떠났다.
프랑크가 64세에 완성한 유일한 바이올린 소나타는 그의 전 작품 중에서뿐 아니라 고금의 모든 바이올린 소나타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명곡이다. 그의 고향인 벨기에 리에주 출신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Eugene Ysaye, 1858~1931)의 결혼을 기념해 증정한 곡으로 고국 벨기에에서 초연됐다.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작곡기법에 있어서 예술적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독일적인 엄격함과 프랑스적인 감수성이 함께 어우러져 냉철함과 정열, 그리고 환상과 사랑의 충만함이 가득 배인 아름다운 작품이다. 4개의 악장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전 악장이 기승전결의 구조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한 악장만을 따로 감상하는 것은 작곡가의 의도에서 벗어난다. 다행히(?) 전곡을 감상하더라도 30분이 채 안 걸리기에 1악장을 듣기 시작하면 좀처럼 중단하기 어렵다.
조용한 피아노 선율의 짧은 서주에 이어 바이올린의 신비로운 음색으로 시작하는 1악장은 차분하지만 마치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인 분위기를 그려낸다. 뭔가 예감하듯이 고요하게 1악장을 마친 후 이내 정열적인 분위기의 2악장이 전개된다. 사랑의 감정이 고조되어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격렬하게 어우러진다. 때론 흥분이 가라앉기도 하지만 감정은 점점 고조되고 정열적으로 찬란하게 끝을 맺는다. 흥분이 가라앉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자유롭게 전개되는 3악장은 전반적으로 바이올린 독주가 마치 독백을 하듯 강렬하지만 아름다운 선율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1악장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끝을 맺으면서 클라이맥스인 4악장을 이끌어낸다. 클라이맥스지만 격정적이진 않다. 대신 밝고 상쾌함이 가득하다.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아름다운 화합은 찬란한 빛을 발하면서 화려하게 끝을 맺는다.
♪ 음악 들어보기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Franck, Sonata for Violin and Piano in A major
2016년 베르비에 페스티벌 실황
1970년대 젊은 시절의 정경화가 라두 루프Radu Lupu와 함께 한 녹음은 손꼽히는 명연이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6년 스위스의 베르비에 페스티벌Verbier Festival에서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한 정경화의 모습은 한층 더 세련되고 정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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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1jhHCumT6c
#3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는 클래식
#3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는 클래식
따스한 봄기운과 함께 꽃망울이 불거지고 가녀린 잎새들이 모습을 드러내지만, 마음은 예년과 같지 않다. 자연스레 삶의 의미나 죽음에 대한 상념을 마주하게 되는 이때, 그나마 브람스가 골라준 성경 구절들을 읽으며 음악을 듣고 있으면 잠시나마 위로와 마음의 안식을 얻게 된다.
브람스, 독일진혼곡 Brahms, Ein Deutsches Requiem, Op.45
30대 중반에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한 개신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후 정식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신앙생활에 그리 충실한 편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교회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성경 구절들은 자주 접했다. 목사님의 설교가 귀에 들어오질 않을 때면 성경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고, 종교음악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읽게 되는 성경 구절들은 경건한 음률과 어우러져 언제나 위로와 안식을 주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죽음’에 대한 생각도 자주 하게 되고, 가까운 사람들의 부음을 접할 때는 편히 쉬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도 한다. 내가 자주 듣는 종교 음악은 레퀴엠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음악이지만 살아남아 있는 자들의 슬픔을 치유하는 음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브람스가 슈만을 찾아갔을 때 그는 20살의 무명에 가까운 청년이었다. 슈만과 그의 아내 클라라는 한눈에 브람스의 재능을 알아냈고, 독일 음악계에 브람스를 알리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이후 슈만은 1856년에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가 슈만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함께 한 시간은 불과 6개월 정도였지만 음악적 스승 이상의 존재였던 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은 컸을 것이다. 브람스는 스승의 죽음을 음악으로 위로하고 싶어 ‘레퀴엠’ 작곡을 진지하게 구상해 보았으나, 이제 막 피아노 독주곡 몇 작품만을 세상에 발표한 청년 작곡가에게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9년 후인 1865년에 브람스는 모친을 잃었다. 44세의 늦은 나이에 그를 낳은 모친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브람스는 이를 계기로 스승의 사망 시점에 구상했던 레퀴엠의 작곡을 서둘렀다. 이듬해인 1866년에는 가곡 몇 곡을 제외하고는 이 레퀴엠에 전념, 전체 7곡 중 6곡을 그해에 작곡했고, 1867년에 제5곡을 추가로 작곡하여 전 7곡으로 구성된 레퀴엠을 완성했다. 슈만의 죽음을 계기로 작곡을 구상한 지 10년 만에 마침내 완전한 형태의 걸작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레퀴엠(Requiem, 진혼곡)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음악으로 본래 카톨릭교회의 라틴어 전례문典禮文에 곡을 붙인 미사missa곡을 의미한다. 모차르트, 베르디, 포레 등 음악가들이 남긴 레퀴엠은 모두 이 전통에 따라 라틴어 전례문에 곡을 붙였다. 그렇지만 브람스가 작곡한 레퀴엠은 이들 레퀴엠과 성격을 달리한다. 카톨릭교회의 라틴어 전례문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에서 브람스 자신이 선택한 텍스트에 곡을 붙였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불리기 위한 전례음악典禮音樂이 아니라 음악회용 레퀴엠으로 봐야 한다. 죽은 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음악이지만 살아있는 자들의 슬픔을 치유하고, 그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 음악이기도 하다. 원 제명은 ‘성서 본문에 따른 독창과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독일어 레퀴엠’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독일진혼곡Ein Deutsches Requiem’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이번 클래식은 곡에 삽입된 가사(성경 구절)를 읽으며 듣기를 추천한다.
-제1곡: 합창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장 4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편 5절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편 6절
세상의 슬픔, 그러나 슬퍼하는 자는 마침내 위로받을 것임을 합창으로 느리고 조용하게, 그리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노래한다. 화려한 음색의 바이올린은 배제된 채 중저음 현악기로 어두운 분위기의 반주가 시작되고, 이어 나타나는 합창은 경건하고 아름답지만 짙은 슬픔이 배어있다. ‘복’과 ‘기쁨’을 노래하는 부분에서 잠시 기분이 고조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슬픔이다.
-제2곡: 합창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야고보서 5장 7절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이사야서 35장 10절
팀파니의 규칙적인 두드림을 배경으로 관현악이 느리지만 엄숙한 행진곡풍의 선율을 제시한 후, 합창이 덧없는 인생을 풀과 꽃에 비유한 성경 구절을 비통하게 노래한다. 야고보서 ‘형제들아, 주가 강림하시기까지 참으라…’를 노래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비통함이 사라지고 잠시나마 아름다운 선율이 평온하게 전개되지만 다시 쓸쓸한 곡조의 베드로전서 말씀을 다시 한번 노래한다. 그렇지만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에 이르러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장엄하면서도 환희에 찬 가락이 울려 퍼진다. 이 기쁨의 곡조는 이사야 말씀으로 옮겨 경건하면서 확신에 찬 희망의 노래가 되어 끝을 맺는다.
독일 본에 묻힌 슈만의 묘지석. 슈만은 브람스의 재능을 발견한 스승이자 그 이상의 존재였다.
-제3곡: 바리톤 독창과 합창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들지는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편 4-7절
나약한 인간의 굳은 신앙심을 호소한 시편의 구절들을 음악으로 구현한 것으로 브람스의 ‘독일진혹곡’ 중에서 구성적으로나 내용면에 있어서 가장 충실하고 완성도가 높은 곡이다. 바리톤 독창이 인간의 연약함과 허무한 인생을 고통스럽게 탄식하고 합창도 이에 따르지만, 시편 마지막 구절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에 이르러서는 경건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로 변하여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곧이어 푸가(주제를 여러 성부가 규율성을 가지고 모방 반복하는 기악 형식으로 바로크시대의 가장 중요한 음악형식 중 하나) 풍의 선율로 불려지는 ‘올바른 사람의 영혼이 주님의 손에 있으니 어떤 고통도 그들에게 닿지 않으리다.’(외경 ‘솔로몬의 지혜’ 제 3장 1절) 부분은 강한 신앙심을 천상의 음률로 호소하는 듯하다.
-제4곡: 합창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편 84편 1-2절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84편 4절
환희에 찬 선율로 천국의 평온함을 노래한다. 3곡 끝부분과 같이 경건하게 주를 찬양하는 곡이지만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전반적으로 온화하고 기쁨에 찬 선율이 계속되어 장엄함이나 엄숙함 대신 안락함이 느껴진다.
-제5곡: 소프라노 독창, 합창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요한복음 16장 22절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니…’ 이사야서 66장 13절
‘내가 잠시 수고한 걸 너희가 보았으나 나는 큰 휴식을 얻었노라.’ 구약외경 ‘펜실라의 지혜’ 중
전 7곡 중 가장 마지막에 작곡한 곡으로 소프라노 독창이 일관되게 위로의 선율을 노래하고, 합창이 응답하면서 전반적으로 밝고 온화한 분위기를 이끈다. 요한복음, 이사야서, 구약외경 등에서 차용한 가사 내용과 같이 위안과 평화로움이 가득하다.
오스트리아 빈의 브람스 동상
-제6곡: 바리톤 독창, 합창 ‘우리가 영구히 머물 도성은 없고’
‘우리가 영구히 머물 도성은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히브리서 13장 14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 54-55절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
가톨릭 전례에 따른 레퀴엠의 ‘진노의 날’에 해당하는 곡이다. 가장 장대한 구성에 극적인 효과가 더해져 진혼곡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합창으로 시작하는 첫 부분은 인간의 애통하면서도 불안한 감정을 호소하고, 이어 나타나는 바리톤 독창은 이런 불안함을 진정시켜주듯 차분한 곡조로 부활의 예언을 노래한다. ‘나팔소리가 나매…’로 시작되는 부활의 메시지 부분에 이르러 트롬본과 튜바, 그리고 팀파니까지 동원되는 관현악이 합창이 어우러져 ‘심판의 날’의 공포와 구원에 대한 기대감이 얽힌 강렬한 화음을 비바체(vivace, 아주 빠르게)의 속도로 쏟아낸다. 후반부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기쁨으로 힘차고 경건한 합창이 주를 찬미한다.
-제7곡: 합창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4장 13절
제6곡에서의 흥분은 사라졌다.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고 영원한 안식처의 평화로움이 가득하다. 느리고 장중하게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의 구절이 반복되면서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끝을 맺는다.
슈만의 죽음을 계기로 구상하기 시작한 후 10여 년 만에 전 7곡을 완성했지만 신중한 성격의 브람스는 완성 후 2년 가까이 지난 1869년(36세)에 ‘독일진혼곡’을 초연했다. 비평가들은 이 위대한 작품에 최고의 찬사들을 쏟아냈고, 브람스는 당대 최고 작곡가 위치에 올랐으며, 자신감을 얻은 그는 훗날 베토벤의 교향곡에 필적할만한 걸작 교향곡들을 작곡했다.
♪ 음악 들어보기
브람스, 독일진혼곡 Brahms, Ein Deutsches Requiem, Op.45
클라우디아 아바도Claudio Abbado 지휘
https://www.youtube.com/watch?v=AOoWUIyBn0Y
서울 모테트 합창단 (Seoul Motet Choir)
#2 봄을 기다리며 듣기 좋은 클래식
#2 봄을 기다리며 듣기 좋은 클래식
올 겨울은 유독 길게 느껴진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엔 눈이 내렸고, 봄비 내리고 싹이 튼다는 우수에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기온이 내려갔다. 이제 곧 3월인데도, 봄이 더디 오는 듯 싶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훈풍이 불고 꽃이 필 것이고, 코로나 바이러스도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기에 마음만은 여유롭다.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Beethoven, Symphony No.6 in F major, Op.68 ‘Pastoral’
그늘진 한 구석에 아직도 눈이 남아있는 마당을 거닐다 보면 꽃들이 피어나고 나비와 벌, 그리고 딱새들이 다시 찾아와주는 봄날을 그려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다, 앙드레 지드의 소설 <전원교향악> 중 한 대목이 떠오른다.
“목사님께 보이는 것들은 정말 그것만큼 아름다운가요?”
“무엇만큼 아름답다는 말이니? 얘야.”
“그 〈시냇가의 풍경>만큼 말이에요.”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 연주회장을 나온 뒤 한동안 황홀경에 빠져있던 장님 소녀 제르트뤼드가 침묵을 깨고 목사에게 질문한다. 목사는 그 교향곡의 화음들이 현실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에 즉답을 피한 채 대답했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리는 행복을 모른단다.”
“그렇지만 볼 수 없는 저는 듣는 행복은 알아요.”
때론 현실보다 상상 속 풍경이 더 아름답게 꾸며지기도 한다. 회색빛 황량한 겨울 마당을 뒤로하고 눈을 감은 채 ‘전원 교향곡’을 다시 들어볼 참이다.
베토벤이 전원교향곡을 탄생시킨 오스트리아 빈 하일리겐슈타트 근교의 풍경
베토벤의 작품세계는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경이롭다. 음악가에게 치명적인 청각 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작곡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1802년)’ 사건 이후 약 7년, 소위 ‘걸작의 숲’이라고 말하는 기간 중 그가 발표한 작품들을 차례대로 나열해 보기만 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소나타 등 서양고전음악의 거의 모든 악곡 양식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곡들이 이 짧은 시기에 탄생했다. 작품번호(Opus, 약어 Op.) 순으로 나열해 본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을 수 있다는 판정을 받고 죽음의 불안에 싸여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남긴 유서. 25년 뒤, 베토벤 사후 공개된 내용을 통해 그가 이때부터 죽음에 대비하기 시작했음이 알려졌다. -편집자 주
zOp.55, 교향곡 3번 ‘영웅’ (1803년)
Op.56,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삼중협주곡 (1804~5년)
Op.57, 피아노 소나타 ‘열정’ (1804~5년)
Op.58, 피아노 협주곡 4번 (1805~6년)
Op.59, 현악사중주 ‘라주모프스키’ (1806년)
Op.60, 교향곡 4번 (1806년)
Op.61, 바이올린 협주곡 (1806년)
Op.62, 서곡 ‘코리올란’ (1807년)
Op.67, 교향곡 5번 ‘운명’ (1805~7년)
Op.68, 교향곡 6번 ‘전원’ (1807~8년)
OP.69, 첼로 소나타 3번 (1808년)
Op.70, 피아노 삼중주 ‘유령’ (1808년)
Op.73,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1809년)
이 작품들 중에도 중심에 위치한 곡이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이다. 같은 시기에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교향곡을 그것도 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베토벤의 위대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에덴낙원메모리얼리조트 가든은 사계절 다른 전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교향곡의 대명사 격인 ‘운명’은 인간적인 반면, 거의 같은 시기에 작곡한 ‘전원 교향곡’에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운명’은 고난과 갈등, 거기서 벗어나려는 투쟁과 몸부림, 그리고 마침내 도달하는 인간의 승리를 그려낸 곡으로 구성과 내용 면에서 가장 완벽한 교향곡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에 비해 ‘전원’에서는 인간세계에서 느끼는 갈등과 투쟁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원pastoral’이라는 제명은 베토벤 자신이 직접 붙였다. 그리고 각 악장에도 별도의 부제를 적어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베토벤 자신이 ‘회화적인 묘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듯이 단순히 사물이나 풍광을 묘사한 음악은 아니지만 베를리오즈, 리스트 등 낭만주의 음악가들에 의해 발전된 ‘표제음악’의 선구적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 1악장 시골에 도착했을 때의 즐거운 기분
2/4박자의 악장이지만 반 박자 쉬고 음악이 시작된다. 못갖춘마디로 서주부 없이 현악으로 여리게 제시되는 1주제는 아주 상쾌하다. 이어 점차 기분이 고조되고, 모든 목관악기들이 동원되어 현악과 어우러진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봄날 한가로운 전원의 모습이 떠오르지만 현악과 관악이 총동원되어 힘차게 울릴 때는 어김없이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 2악장 시냇가의 정경
시냇물은 빠르게 흐르지 않는다. 부드럽게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지만 어느 곳엔가는 제법 커다란 연못을 만드는 듯, 풍성한 현악기들의 울림이 다채로운 물의 흐름을 그려낸다. 끝 부분에서는 새들도 찾아와 시냇가의 정경이 더욱 정겹다. 나이팅게일(플루트), 메추리(오보에), 뻐꾸기(클라리넷)의 울음소리가 시냇물소리와 어울려 평온한 전원의 모습을 그려내며 끝을 맺는다.
- 3악장 시골 사람들의 즐거운 모임
알레그로allegro의 빠르기로 흥겹게 시작한다. 사람들이 점차 많이 모이는 듯 흥겨움은 고조되고, 익살스런 관악기들의 울림은 마치 잔치를 벌이는 듯하다. 1,2악장에서 볼 수 없었던 트럼펫의 힘찬 울림까지 합세해 분위기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갑자기 현악기가 불길한 선율들을 만들어 내면서 중단 없이 4악장으로 넘어간다.
- 4악장 폭풍우
팀파니, 그리고 관악기 중 가장 성량이 큰 트롬본까지 합세해 엄청난 폭풍우를 몰아온다. 중간에 잠시 잦아들다가도 이내 세찬 바람에 천둥, 번개까지 동원한 폭풍우가 다시 몰아친다.
- 5악장 목가, 폭풍이 지나간 뒤의 기쁨과 감사
3분여의 짧지만 강렬했던 폭풍우가 잦아들면서 팀파니의 울림도 멀어져간다. 클라리넷과 호른의 목가적인 선율로 시작하는 5악장은 다시금 1악장에서처럼 상쾌하고 여유롭다. 폭풍우 뒤의 전원 풍경이라 1악장에서와 같은 들뜬 마음은 없다. 아름다운 자연을 만들어 준 신께 감사하는 듯 장엄하기까지 하다.
곧 찾아올 아름다운 에덴가든의 봄 풍경
비록, 귀가 들리지 않은 내면의 상태에서 창조해 낸 전원의 모습이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산책을 즐겼던 베토벤이 그려낸 그것은 장님 소녀가 꿈꾸는 자연의 모습과도 닮아있지 않을까? 그 풍경은 오늘날 음악가들의 손끝에서 다시 생생하게 태어난다.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과 바렌보임의 연주로 전원의 봄을 그려 보시길 바란다.
♪ 음악 들어보기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Beethoven, Symphony No.6 in F major, Op.68 ‘Pastoral’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지휘
https://www.youtube.com/watch?v=aW-7CqxhnAQ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지휘
#1 겨울이 그려내는 선율
#1 겨울이 그려내는 선율
올겨울은 유독 추운 날씨와 코로나 19로 인한 집합금지로 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책과 음악에 친숙해졌다. 따뜻한 아랫목과 안락한 의자, 좋은 책 한 권, 그리고 이달 들려드릴 클래식 음악이 있다면, 겨울의 끝자락을 음미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사실 ‘겨울’이 연상되는 클래식 음악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비발디와 하이든이 ‘사계’라는 제명으로 각각 협주곡과 오라토리오를 남겨 계절의 변화를 실감 나게 표현해냈지만, 오롯이 겨울 만의 이미지를 그려낸 작품은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등이 활동했던 낭만파 시대에 들어서나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비발디, 바흐, 헨델을 중심으로 한 바로크 시대나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활동했던 고전파 시대에는 특정 소재를 표현하는 표제음악보다 순수한 음(音)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절대음악이 주류였다. 또 낭만파 이전까지 문학, 미술 등 다른 분야 예술과의 교감이 부족했던 탓도 있다.
에덴낙원의 겨울
겨울 이미지가 가득 담긴 음악으로는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나그네’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도 겨울철엔 꼭 들어보고 싶은 곡이다. 또 하나 있다. 20세기에 태어난 러시아 작곡가 스비리도프Georgi Vasilyevich Sviridov의 ‘눈보라The snowstorm – Musical illustrations to Pushkin’s Story’. 많이 알려진 작곡가는 아니지만 전체 9곡으로 구성된 ‘눈보라’ 중 4번째 곡 ‘로망스’만큼은 겨울 내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
1859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를 졸업한 후 공무원 생활을 하던 차이코프스키Peter Ilitch Tchaikovsky는 틈틈이 음악 공부를 병행하다 1863년에 관리직을 포기하고 스승 안톤 루빈스타인Anton G. Rubinstein이 설립한 음악원에 입학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재능을 인정받아 졸업 1년 후인 1866년(26세) 모스크바음악원 강사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같은 해 그는 첫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해 두 개의 악장을 발표했고, 2년 후인 1868년(28세)에 4개 악장으로 구성된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 모스크바에서 초연했다.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는 6곡의 교향곡만을 남겼다. 사실 완숙기에 접어든 37세에 발표한 4번, 48세에 완성한 5번, 그리고 죽기 바로 전에 발표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돼버린 6번 ‘비창’에 비하면 초기 작품에 속하는 1, 2, 3번은 자주 연주되는 편이 아니다. 그렇지만 1번 교향곡에 대한 애착만큼은 매우 강했다. 아마 첫 대작인데다 스승의 냉담한 반응에 의기소침해져 수차례 개정을 거쳐 초연한 작품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차이코프스키는 초연 이후에도 한 차례 더 수정을 거쳐 작곡을 시작한 지 6년만인 1874년 최종 개정판을 출판했다.
1악장의 부제 명은 곡 제목과 같은 ‘겨울날의 환상’이다. 러시아 민요풍의 선율로 시작해 전반적으로 밝고 활기찬 느낌의 악장이다. 부제에 대한 설명이 따로 없어 작곡가의 의도는 알 수 없으나 혹독한 추위로 활동이 제한된 겨울날, 환상 속에서나 그려보는 즐거운 여행길을 묘사하는 것 같다. 끝부분에 이르러서는 마치 환상에서 깨어나는 듯 고요한 선율로 여운을 남긴다.
2악장의 부제는 ‘황량한 땅, 안개의 땅’이다. 아다지오 칸타빌레, 즉 느리게 노래하듯이 연주하는 악장이다. 부제가 주는 삭막한 느낌은 전혀 없다. 현악기 합주로 시작하는 잔잔한 선율은 마치 안개 낀 광활한 대지를 묘사하듯 모호한 느낌이 나지만, 곧이어 나타나는 오보에 선율은 애절하면서도 서정적인 러시아 민요를 노래하고, 이후 변형된 주제들이 다양한 악기로 전개된다. 후반부에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면서 흥분된 호른이 큰소리로 주제 선율을 외치지만 다시금 온화한 분위기로 변하면서 조용히 끝을 맺는다.
3악장은 부제가 없다. 다소 익살스러운 스케르초 풍의 경쾌한 선율이 지배적인 악장이지만 중간에 노래하듯이 나타나는 현악기들의 선율엔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4악장 역시 부제를 따로 붙이지 않았다. 다양한 주제들이 때론 느리고 온화하게, 때론 격렬하고 활기차게 나타나, 서정적이기도 하고 정열이 넘치기도 한다. 차이코프스키 특유의 자유로운 악상 전개 방식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힘차게 부르짖는 듯한 종결 부분은 언제 들어도 흥겹다.
♪음악 들어보기
차이코브스키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 (전곡)
https://www.youtube.com/watch?v=ocIajFkPwyU
차이코브스키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 (2악장)
https://www.youtube.com/watch?v=9pXr7VKJT2g
스비리도프의 ‘눈보라’
러시아의 한 마을, 부유한 집안의 아름다운 한 처녀가 옆집에 잠시 머물고 있던 하급 장교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그 청년과의 결혼을 허락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처녀는 어느 날 밤 부모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긴 채 몰래 가출해 이웃 마을 교회로 향한다. 하급 장교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준비한 것이다.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던 그 날, 처녀는 무사히 교회에 도착해 청년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하급 장교는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새벽녘에야 교회에 도착했지만 이미 교회 문은 닫혀있었다. 하급 장교가 길을 헤매고 있는 사이 장교 복장의 다른 청년이 교회에 나타난다. 눈보라를 피하려고 들어간 교회엔 결혼식이 준비돼 있었고, 그 장교는 영문도 모른 채 신랑 자리에 앉혀졌다. 장난기가 발동한 청년은 신랑인 양 행세했다. 마침내 혼인 서약이 끝나고 입맞춤 순간, 처녀는 놀라 소리치며 기절해 버렸고, 청년은 허겁지겁 교회를 빠져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날 이후 처녀는 심한 열병을 앓아눕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하급 장교는 전쟁터로 떠났다가 전사했다. 세월이 흐른 후 부친을 잃은 처녀가 부유한 상속녀가 되자 주변엔 청혼자들이 몰려들지만, 그녀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휴가차 그 마을에 머무른 한 고위급 장교가 아름다운 처녀에게 반하게 되고 이렇게 사랑 고백을 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청혼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미 오래 전 한 여인과 결혼한 몸입니다. 그 여자가 누군지, 어디에 사는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눈보라를 피해 들어간 교회에서 용서받기 어려운 장난으로 한 결혼이지만 그 죗값을 치러야 할 몸이기 때문입니다.”
스비리도프의 고향 쿠르스크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서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의 단편 ‘눈보라’의 줄거리다. 러시아에서는 1964년 이 작품을 영화화했는데 영화 내내 스비리도프가 작곡한 음악이 흐른다. 스비리도프는 영화에 삽입된 곡을 중심으로 1975년 총 9곡의 음악을 발표한다. 제명은 영화와 동일한 ‘눈보라’. 1곡(트로이카), 2곡(왈츠), 3곡(봄과 가을), 4곡(로망스), 5곡(전원), 6곡(군대 행진곡), 7곡(결혼식), 8곡(왈츠의 메아리), 9곡 (겨울 길). 소제목만 읽어보아도 소설 속 이미지가 연상된다. 특히 로망스는 2003-2004 시즌 쇼트 프로그램에 참가한 김연아의 배경음악으로 쓰여 더욱 잘 알려진 곡으로 겨울 사랑의 테마를 잘 표현했다.
♪ 음악 들어보기
스비리도프의 ‘눈보라’ 전 9곡
https://www.youtube.com/watch?v=z4N4QXDjHqk
스비리도프의 ‘눈보라’ 중 4곡 로망스 (김연아 피겨스케이팅 배경음악)